[한국경제] [人사이드 人터뷰] 탈북장교 출신 사업가 김정아 성진 대표

책상 하나와 의자 네 개를 놓으면 가득 차는 작은 사무실이었다. 하지만 인천창조경제혁신센터 제물포센터에 막 입주한 김정아 씨의 얼굴엔 웃음꽃이 가실 줄 몰랐다. 탈북 장교 출신 방송인, 육군 정책홍보 자문위원, 통일맘연합회 대표로 활동하던 그가 이제 ‘사장님’이 됐다. 회사 이름은 성진. 세면기 배수구 부품을 제조하는 곳이다.

지난해 11월 특허청이 주관하고 한국여성발명협회가 주관한 ‘2016 생활발명코리아’에서 대상인 대통령상과 발명장려금 1000만원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사업은 순조로워 벌써 국내 욕실용품 제조업체인 새턴바스와 납품 계약을 맺었고, 일본과 인도네시아 수출도 추진 중이라고 한다.

김정아 대표는 “로열티(기술료)를 받고 특허를 넘기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거절했다”며 “로열티 받아 나 혼자 잘살 수도 있겠지만 직접 사업을 벌여 탈북 여성을 돕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부품 조립에 탈북 여성을 고용하고, 수익금 일부는 자녀와 생이별해 고통받는 탈북 여성을 돕는 데 쓸 계획이라고 했다.

막힌 세면대에 속 터져 직접 발명 나서

그가 발명대회에서 선보인 제품은 ‘속 시원한 세면기’다. 세면대나 욕조 배수구가 머리카락 등 이물질 때문에 막히지 않도록 팝업(pop up)이라는 기존 배수구 부품을 개량한 것이다.

“평소 세면기가 자주 막혔어요. 그때마다 남편이 뚫어줬는데, 남편이 회사를 옮겨 오전 6시에 집을 나가 밤 9시에 들어오는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세면기가 막혀 물이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다 제가 작년 봄에 폭발했어요.”

지난해 봄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날 아침 방송 준비로 바쁘던 김 대표는 세면기 물마저 잘 내려가지 않자 “열불이 터져 남편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고 나왔다”고 했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은 세면대 부품을 다 뜯어놓았다. “이 사람도 열이 받았던 거죠. 그 덕분에 세면대 속을 처음으로 다 볼 수 있었습니다. 둘이서 한참을 들여다보니 왜 막히는지 알겠더라고요.”

문제는 팝업이라는 배수구 부품에 있었다. 세면대 구멍과 배수관을 이어주는 10㎝가량의 짧은 관이다. ‘세면대의 목구멍’이라 할 수 있다. 김 대표는 “수동 팝업은 배수 뚜껑을 여닫도록 하는 지렛대 부품에, (배수 뚜껑을 손으로 눌러 여닫는) 자동 팝업은 회오리 모양으로 난 물길에 머리카락이 잘 걸린다”며 “이 물길만 일직선으로 터주면 머리카락이 걸릴 일이 없다”고 했다.

북한에서 자주 하던 도랑 작업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단다. 북한에는 포장 안 된 흙길이 많다. 상하수도 시설도 미비하다. 그래서 길 옆에 도랑을 내 물이 흘러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도랑이 막혀 물이 길 위로 넘칠 때가 많다”며 “그러면 사람들이 동원돼 옆으로 물길을 돌리는 작업을 한다”고 했다. 세면대도 머리카락 등 이물질이 잘 내려가도록 물길만 따로 잘 내주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머리카락 같은 이물질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하수관으로 흘러들어가도 괜찮을까. 김 대표는 “괜찮다”며 “수도시설관리소에서 괜찮다는 확인까지 받았다”고 했다. “머리카락보다 음식물 기름이 더 문제래요. 머리카락은 아무 문제 없이 하수처리장까지 흘러가지만, 음식물 기름은 물속에서 응고돼 하수관을 막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세면대가 막혔을 때 사람들이 독한 약품을 쓰곤 하는데, 그러면 하수관 수명이 5~10년은 줄어든다”며 “사소한 세면대 막힘이 막대한 국가적 낭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작년 11월23일 특허를 출원하고 올 6월 회사를 세웠다. 인도네시아계 물류회사에 다니는 남편이 공동대표를 맡아 사업을 도와주고 있다. 그는 “발명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나니 사업에 욕심이 생겼다”고 했다. 인천 청라산업단지에 공장 건물 일부를 빌렸고, 한국과 중국에서 외주로 제작한 금형 부품을 여기서 조립하면 된다. 김 대표는 “사무와 공장 직원을 합해 열 명 정도로 시작할 계획”이라고 했다.

순탄하지 못한 북한 생활



김 대표는 1976년 1월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사흘 만에 입양됐다. 양아버지는 청진 수산사업소 기사장, 양어머니는 청진백화점 부기장(영업부장)이었다. 다섯 살 많은 양오빠가 있었다. 그는 “양부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입양된 줄 전혀 몰랐다”며 “친딸처럼 키워주고 집도 풍족한 편이었다”고 했다.

행복하던 삶도 잠시 그가 열두 살 때 양아버지, 3년 뒤 양어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앞에 기구한 운명이 펼쳐졌다. 양부모가 죽고, 양오빠가 군에 입대하면서 고모를 비롯한 친척들의 구박이 심해졌다고 한다. “너무 힘들어 군에 있던 오빠를 찾아가 울면서 하소연했어요. 그때 내가 입양된 딸이라는 얘기를 들었죠.”

김 대표는 고교를 졸업할 무렵 다시 한번 입양됐다. 양오빠가 있던 김책사단의 정치위원 집이었다. 정치위원과 고모 사이에 거래가 있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라 고아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던 때였어요. 상황이 심각해지자 김정일이 ‘공산주의적 미풍을 발휘해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정치위원은 나를 입양해 명예를 챙기고, 고모는 양부모가 내게 남겨준 집을 갖기로 한 거였어요.”

1993년 3월1일 그를 강제 입양한 정치위원은 “홀로 남은 누이를 걱정하는 군인이 복무를 잘하도록 입양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그해 4월25일 “당신은 훌륭한 당일꾼입니다”라는 김정일의 친필 서한이 내려왔다. 정치위원은 이후 승승장구했고, 고모는 그가 살던 집을 처분해 돈을 챙겼다.

자식으로 입양됐지만, 정치위원 집에서 그는 가사도우미였고 하녀와 다름없었다. 눈치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설거지와 빨래, 청소, 밭일 등 온갖 궂은일을 해야 했다. 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대학도 못 가고 열일곱 살에 군에 입대해야 했다. “김정일에게 표창까지 받은 정치위원이 나를 여성 군관으로 키워 상부에 더 잘 보이려 했어요. 오빠까지 앞세워 저를 회유했습니다. 1993년 8월 조선인민군 국경경비총국 산하 해안경비대에 입대했어요.” 혹독한 훈련과 영양실조로 군에서 일시적 하반신 마비까지 겪었다고 한다.

10년 동안 복무한 뒤 결혼하면서 제대했다. 그렇다고 행복해지진 않았다. 딸을 낳고 아들을 임신 중일 때 남편의 폭행으로 조산했다. 아들은 열 달 만에 죽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남편과 이혼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살길이 막막했다. 양오빠도 폐농양에 걸려 세상을 뜬 뒤였다. “도무지 살길이 없어 정치위원 집을 찾아갔지만 문전 박대하더군요. 그때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내가 탈북하면 그도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죠.” 그는 2006년 6월 중국으로 탈출했다.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 농촌에 시집을 갔다 2009년 한국에 들어왔다. 북한 남편 사이에 생긴 아이를 중국에서 낳았지만, 중국 정부의 강제 북송이 두려워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낳은 딸은 중국인 남편이 키우고 있다.

“성공해서 딸 찾고 싶어요”

김 대표가 회사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발명대회에서 상을 받은 덕분만은 아니다. 그는 “한국에 온 뒤 한 달에 10만원으로 버티며 배우는 데 올인했다”고 말했다. 정보기술자격증(ITQ)을 따면서 엑셀과 파워포인트 사용법을 배웠다. 회계도 공부했다. 그는 “양어머니가 백화점 부기장이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회계 총책임자”라며 “어렸을 때부터 주판을 갖고 놀아 셈에는 자신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국내 중소기업 경리 일을 하다 교회에서 북한 선교 일을 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2011년 12월 결혼했다.

2012년 아들을 낳은 뒤에도 국제사이버대 경영학과를 다니는 등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전 5~6시에 일어나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TV 방송 출연과 육군 안보 강의를 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아이와 놀아주고, 밤 1~2시까지 공부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작년 8월에 국제사이버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경영학과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그는 “사업을 시작했으니 제대로 경영해보고 싶다”고 했다.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느냐고 물으니 “내가 성공하는 게 통일에 기여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2015년 7월 설립한 통일맘연합회의 자금 명세서를 보여줬다. 김 대표처럼 탈북 과정에서 자녀와 헤어진 여성을 돕는 단체다. 명세서엔 그가 방송 일을 하며 번 돈을 통일맘연합회 활동비로 쓴 내용이 적혀 있었다. “후원금을 받지만 부족해 사비를 넣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 대표는 다부지게 말했다. “내가 능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사업이 잘돼서 딸도 빨리 찾고 싶고,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통일맘연합회 회원들도 돕고 싶습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그에겐 동해 바다가 고향이다. 강원 양양이나 속초 앞바다를 보면 양부모와 즐겁게 놀던 청진 앞바다가 생각나기 때문이란다. 그는 “바다에 갈 때면 부모님과 오빠를 위해 소주 한 병을 따라 드린다”며 “이번 추석에도 동해 바다에 가보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 통일맘연합회는
"자녀와 생이별한 탈북 여성의 현실, 국제사회에 알리고 있죠"



“중국에 두고 온 아이를 다시 안고 싶어요.”

지난해 11월3일 미국 뉴욕을 찾은 김정아 통일맘연합회 대표(오른쪽)와 탈북 여성 회원 두 명은 서맨사 파워 당시 유엔 주재 미국대사(왼쪽)를 만나 하소연했다. ‘속 시원한 세면기’로 발명대회 대상을 받은 김정아 씨가 2005년 설립한 통일맘연합회는 탈북 과정에서 자녀와 생이별한 탈북 여성을 돕는 단체다. 탈북 여성 10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김 대표 등은 지난해 미국을 방문해 국무부, 유엔, 헤리티지재단, 하버드대, 웰즐리대 등을 찾아다니며 중국 등 제3국에서의 탈북 여성 인권 유린 실태를 고발했다.

그는 “북한 여성이 탈북할 때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 남성에게 팔려가는 일이 많다”며 “중국 남성 사이에 아이를 낳아도 중국 정부의 강제 북송 때문에 함께 살기가 어려운 형편”이라고 했다. 탈북 여성들은 강제 북송을 피해 다시 한국으로 도망치고, 자녀와 생이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 대표 자신도 북한인 전남편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중국에서 출산했다. 그가 2009년 한국에 오면서 헤어져 2013년 1월 아이와 전화통화를 한 것이 마지막이라고 한다.

김 대표는 “탈북 여성들은 한국에 정착한 뒤 중국인 남편에게 아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지만 대부분 거절한다”며 “심지어 아이에게 ‘엄마가 너를 버렸다’는 식으로 얘기해 아이가 엄마를 만나기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탈북 여성은 자식을 보지도 못하는데 이런 원망을 들으며 죄책감까지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통일맘연합회가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는 탈북 여성과 중국인 남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에게 중국 호적을 줄 것, 둘째는 한국 국적을 가진 탈북 여성에게 아이를 만날 수 있는 면접교섭권을 줄 것, 셋째는 아이가 엄마와 살고자 하면 탈북 여성이 양육권을 가질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보장을 해줄 것 등이다. 그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나와 있는 내용”이라며 “중국은 유엔 회원국이면서도 이를 지키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